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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3 13:39

김영삼이 남긴 나비효과, '재정건전성'이라는 괴물


재정건전성 때문에 가장 큰 정치적 공격과 비난을 받았던 건 노무현 정부가 아니었나 싶다. 특히 임기 후반기에는 언론과 야당, 학계까지 ‘방만한 재정운용 때문에 나라 망한다’는 식으로 비판하곤 했다. 당시 보도를 몇개만 들춰보면 "국책 연구기관 전문가들까지 더 이상 침묵하기 곤란할 만큼 상황이 악화"(나성린, 중앙일보, 2007/1/31)됐다느니 "한국의 재정건전성이 갈수록 위협받고 있다"(동아일보, 2007/08/24) 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표만 놓고 보면 그런 걱정이 나오는걸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노무현 정부 집권 첫 해인 2003년 국가채무는 165.7조원이었지만 2004년에는 203.1조원, 2005년에는 248.0조원, 2006년에는 282.8조원, 2007년에는 298.9조원으로 300조원을 바라보게 됐다. 집권 5년 동안 늘어난 국가채무가 165.3조원에 이른다. 대략 두 배가 늘어났다. 여기까지는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거의 모든 이들이 얘기하지 않는 사실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최근 사망한 전 대통령 김영삼이 후임 대통령들에게 남긴 일종의 ‘나비효과’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채무가 급증한 원인을 살펴보면 공적자금과 만나게 된다. 김영삼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 겨울을 유달리 춥게 만들었던 외환위기 와중에 김대중 정부가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처음엔 국가채무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공적자금 가운데 52.7조원이 노무현 정부 시절 국채로 전환됐다. 거기다 외환위기 이후 환율방어에 대한 강박증이 커지면서 외환시장 안정화를 위한 ‘외국환평형기금’ 채권 발행도 69조원이나 됐다. 이를 합하면 121.7조원이다.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늘어난 국가채무 165.3조원 가운데 대부분이다.


정부재정수지는 통합재정수지와 관리재정수지로 나눈다. 일반적으로는 관리재정수지를 기준으로 한다. 통합재정수지만으로 보면 국민연금 수입 때문에 착시효과가 너무 크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관리재정수지는 2004년 -4.0조원(GDP 대비 -0.5%), 2005년 -8.1조원(-0.9%), 2006년 -10.8조원(-1.2%)이었다가 2007년에는 3.6조원(1.6%) 흑자를 기록했다. 노무현 정부는 각종 지표만 따져보면 오히려 보수적인 재정운용을 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환율방어와 고환율정책은 김대중 정부 이후 현재까지도 국가채무를 증가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외환시장 안정용 국가채무는 김대중 정부에서 16.5조원, 노무현 정부에서 69조원을 기록했으며 이명박 정부도 임기 3년 동안 30.9조원이나 됐다.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13년간 120.6조원이나 빚을 진 셈이다(지주형, 2012, 419쪽).


한국에서 재정건전성 문제가 본격적인 국민적 관심사가 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부터다. 어찌보면 김영삼 정부가 우리에게 남긴 달갑지 않지만 불가피한 유산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김대중 정부는 대규모 공적자금과 경기부양정책을 펼쳤다. 그 전까지 상식이었던 세입 범위 안에서 세출을 집행한다는 재정원칙을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1998년도 관리재정수지가 24.9조원 적자를 기록했다. 막대한 공적자금이 조성되면서 일각에선 공적자금이 결국 재정부담으로 귀결될 것이고 이는 재정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다.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은 오랫동안 재정건전성을 중시하는 정책노선을 견지해왔다. (물론 여당일때는 예외다.)  김대중 정부 당시에는 재정건전성 유지를 의무화하는 재정준칙 도입 입법을 추진하기도 했다. 2007년 대선 당시에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은 ‘방만한 재정운용’을 공격하는 선거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공격적인 감세 정책을 추진한 2008년에는 주로 <경향신문>과 <한겨레> 등에서만 세입감소가 재정건전성 악화로 귀결될 것이라고 비판하는 정도였지만 2009년 들어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늘어난 재정적자와 정부부채가 재정건전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2010년에는 본격적으로 그리스 유럽 재정위기가 거론되면서 위기감이 확산됐다.


이명박 정부 재정원칙은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극적으로 변했다. 낙수효과와 시장근본주의를 내세우며 ‘감세천국 증세지옥’을 외치던 모습에서 벗어나 재정건전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재정전략회의에서 내세운 핵심 과제만 봐도 2008년에는 ‘선진일류국가 건설’, 2009년에는 ‘경제 재도약과 미래 대비’였지만 2010년에는 ‘지속 가능한 재정건전성’으로 바뀌었다. 이는 2011년 ‘지속가능한 재정’ 2012년 ‘균형재정 회복 및 유지’로 이어졌다. 2011년 8·15 경축사에서는 균형재정 달성 목표를 기존 2014년도에서 2013년도로 1년 앞당기겠다고 약속했다.(당연히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재정건전성은 단순하게 말하면 ‘채무불이행이 발생하지 않으면서 재정수지를 균형으로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구조적이고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지 여부’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재정건전성을 둘러싼 논쟁은 예나 지금이나 ‘객관적’ 지표가 아니라 정치경제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어떤 정치경제모델을 추구하는지 등 세계관의 문제였다. 관리재정수지만 놓고보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보다 재정건전성이 훨씬 양호했지만 재정건전성 때문에 욕먹은 건 김대중 노무현 정부였다. 당시 재정건전성을 두고 그렇게 각을 세웠던 학자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조용하기만 하다.


연도별 재정수지(단위: 조원) *출처: 국회예산정책처(2015: 157)


다시 강조하지만 재정건전성 정책은 객관적 지표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담론의 문제다. 한국 사회 재정건전성 담론지형에서는 감세와 긴축을 통한 재정건전성이라는 프레임이 강력한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 이 프레임에서 보면 재정건전성을 위한 무상급식 반대와 감세정책 추진은 전혀 모순관계가 아니다. 하지만 이 프레임은 심각한 자기모순을 갖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바로 ‘무엇을 위한 재정건전성인가’다.


한국의 주류담론은 재정건전성을 근거삼아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재정위험을 강조하지만 정작 정작 저출산·고령화를 위한 재정지출을 재정건전성을 들어 반대한다. 통일에 대비하기 위한 재정건전성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이명박이 통일을 위한 선제적 재정확충을 들어 통일세 얘기를 꺼냈을때 재정건전성 유지가 먼저라며 극렬 반대했다. “복지정책을 위해서는 돈이 든다”며 증세 없는 복지강화를 내세운 민주당을 비판했지만 ‘복지는 하되 돈이 들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복지강화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치권을 포퓰리즘이라 비판하다 보니, 재정건전성이 아니라 ‘부자감세’를 최우선 목표로 삼았던 이명박 정부에게 재정건전성을 수호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자기모순이다.


한가지 더 고민해야 할 대목은 ‘재정건전성 악화를 막기 위한 긴축’이라는 정책처방은 효율성과 공평성에서 모두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대공황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되짚어보자.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1년 영국 정부는 의회 공식위원회인 메이 위원회 권고에 따라 재정적자 6억 달러(GDP 대비 2.5%)를 만회하기 위한 재정긴축정책을 실시했다. 실업수당 10퍼센트 삭감을 포함해 3억 5000만 달러의 지출을 삭감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대공황 해소에 별 도움이 안됐다.


문제의 본질은 균형예산 여부가 아니라 민간 소비위축과 양극화였기 때문이다. 대공황 극복은 적극 재정지출과 민간 소비활성화 유도를 통해 가능했고, 미국발 세계금융위기도 다르지 않았다. 이는 1997년 외환위기를 극복한 원동력에 대한 재평가와도 맞물린다. 신장섭·장하준이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에서 그리고 지주형이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에서 강조하는 것 역시 한국이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실제 요인은 국제통화기금(IMF)이 강요했던 재정긴축과 고금리가 아니라 적극적인 재정지출과 금융완화 덕분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일전에 장하준과 인터뷰하면서 들었던 내용을 인용해본다

( http://www.betulo.co.kr/1890). 


“재정위기는 병으로 인해 드러나는 증상일 뿐이다. 암에 걸려서 설사를 하고 살이 빠졌는데 그걸 설사병이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처럼 현 상황을 재정위기로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재정악화의 원인은 금융위기다.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침체로 세수가 줄어들었고,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구제금융에 막대한 돈을 쓴 것이 재정적자의 원인이다. 인과관계를 잘 봐야 한다. (금융자본이) 급할 때는 재정적자에도 불구하고 구제금융 환영하다가 한숨 돌리고 나니까 재정건전성 바로잡지 않으면 경제가 망한다는 식으로 나온다. 특히 영국에선 재정위기를 핑계로 복지를 대규모로 삭감하는데 영화에 빗댄다면 ‘제국의 역습’이라고 할 만한 상황이다. (중략) 재정적자를 줄인다고 경기활성화되는게 아니라 경기활성화로 재정적자를 줄이는 쪽으로 정책을 구성해야 한다.”


참고문헌

국회예산정책처 (2015). <2015 대한민국 재정>.

강병구 외 (2007). 「미래 한국의 조세재정정책」. 미래 한국의 경제사회정책 패러다임 연구 제4권. 한국노동연구원.

지주형 (2012).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 책세상.

Shin, Jang-Sup & Chang, Ha-Joon. (2003). Restructuring Korea INC. 장진호(옮김) (2004).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무엇이 문제인가」. 창비.


강국진·김성해(2013), <재정건전성 담론 해체하기_ 미디어담론에 내포된 프레임 구조와 변화를 중심으로·한국언론정보학보63>을 수정보완해서 미디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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